[강미숙의 세상돋보기] 2022년 한국에 던져진 배우에 관한 역설

강미숙 / 기사승인 : 2022-01-04 15:3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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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지성사의 '배우에 관한 역설'.

 

[칼럼] 강미숙= 선거라는 게 참 재미있다. 정치만큼 다이내믹한 생물이 또 있을까 싶지만 엄밀히 말하면 최고 살아있는 생물은 정치가 아니라 ‘선거’다. 후보든 참모진이든 아무리 감추려 해도 실력과 본질이 드러나게 마련이고 세련되게 감추어두었던 욕망은 자신에게 불리한 국면이 연출될 때마다 하나씩 하나씩 벗겨져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는 양파처럼 분해되고 만다. 그럼에도 후보들은 지지자와 트로피를 손에 거머쥐었을 때의 환희를 과대 숭상하므로 치명적인 중독에 빠져든다. 모르긴 해도 최고의 오르가슴은 열렬한 지지자들의 환호 속에 있을 때가 아닐까 싶다. 아니다 싶을 때 접을 줄 안다면 철저한 실리주의자이거나 자신에 대한 통찰력을 가진 자이거나 둘 중의 하나다.


주먹의 맛을 알아버린 십대 소년에게 장비의 장팔사모를 맡긴 듯 위험하기 짝이 없는 윤석열의 약진에 5.16 쿠데타 이전으로 돌아가게 되는 게 아닐까 하는 공포로 전율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개사과, 사랑사과, 3프로라는 3종 선물세트 이후 다소 맥빠진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여전히 정권교체를 외치는 목소리에 어부지리로 올라탔다 스스로 자신을 유폐시키는 게 주특기인 촬스는 새로운 꿈을 꾸기 시작했다. 어쩌면 이제부터 진짜 대선이 시작된 것일지도 모른다.

김종인은 지지율 역전이후 망나니처럼 날뛰는 후보에게 급기야 선대위에서 해달라는 대로만 연기해달라고 짜증을 드러냈다. 메시지를 잘 전달하려면 자기가 해준 대로 후보가 소화하면 문제가 없는데 배우를 넘어 핸들링을 하려고 한다고 역정을 낸다. 논란이 되자 대변인은 지난 여름 국민캠프 출범당시 후보가 ‘선거전문가들이 감독 역할을 해주면 충실하게 움직일 수 있는 배우 역할을 하겠다’고 했다며 똥볼을 얹었다. 드디어 대선 후보가 배우로 명명되기 시작한 기념비적인 사건이다.

내가 아는 한 배우는 연출가나 감독이 하라는 대로 연기하는 꼭두각시가 아니다. 만약 그러하다면 AI가 대체하기 딱 좋은 직업이 될 것이다. 굳이 배우에 비유하자면 선거는 한번 찍어서 편집을 마친 필름이 아니라 매번 무대 위에서 실연을 해야 하는 연극에 가까울 텐데 무대만큼 살아있는 생물이 또 있을까. 객석의 미묘한 공기의 흐름도 포착해야 하고 상대 배우의 컨디션도 고려해야 하며 무엇보다 어떤 경우에도 자신이 맡은 역할을 컨트롤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감독이 하라는 대로만 연기하면 된다는 것은 배우에 대한 모독이다.

불문학자 주미사 님의 번역으로 읽게 된 계몽주의 철학자 드니 디드로의 <배우에 관한 역설>에는 배우에 관한 의미심장한 대목이 나온다. 훌륭한 배우는 판단력이 좋아야 하고 냉정하고 침착한 관찰자여야 한다. 즉 통찰력을 요구한다. 그러나 감성은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 “인간 본성에 대해 사색과 연구를 거듭하고 이상적 모델에 따라 꾸준히 모방하고 상상력과 기억력으로 연기하는 배우는 모든 공연에서 한결같으며 한결같이 늘 완벽하다”며 일관성, 통일성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혼으로 연기하는 배우의 고르지 못한 연기’처럼 감성이 끼어들면 역할과 자신을 동일시하게 되어 일관성 있는 연기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배우에 관한 역설> 드니 디드로, 주미사 옮김, 문학과 지성사 p.15

나는 이 대목을 읽으며 ‘자신을 안다’는 것과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 두 가지의 중요성을 생각했다. 훌륭한 배우는 혼신을 다해 연기하는 사람이라고 피상적으로 써왔던 말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자신이 맡은 역할을 자신과 동일시하는 게 아니라 ‘역할’의 대상화와 동일시 그 중간 어디쯤으로 적당한 거리두기를 통해 관객에게 완벽한 ‘역할’을 보여줘야 한다는 것. 역할을 이해하고 열심히 연구하는 만큼 무대 위에서 역할을 완벽하게 구현해 내는 것, 이것이 혼신의 연기가 아닐까 하는. 지난주에 보고 온 <더 드레서>라는 연극에서 드레서 노먼 역의 오만석 배우는 동시에 세 작품을 연기하고 있다고 했다.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은 그가 역할을 배역으로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다는 뜻이리라.

우리는 각자의 삶이라는 무대 위에서 자신의 삶을 연기하며 산다. 다양한 역할이 있어 무대가 바뀔 때마다 역할이 달라지고 하나의 역할에도 다양한 페르소나가 있다. 한 인간을 다면적으로 이해하지 않고서는 ‘안다’고 할 수 없는 이유다. 역할에 성공하려면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어디까지 할 수 있는가 하는 역할과 역할 수행능력을 스스로 냉철하게 파악하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 해야 하는 일과 하면 안 되는 일을 구분할 줄 아는 것이 역할을 잘 해낼 수 있는 비결이다. 의지만으로 안 되는 일들이 있고 때로 나서고 싶어도 나서서는 안 되는 일들이 있지 않은가. 그러려면 자신에 대한 통찰이 우선적이다.

어쩌면 김종인의 말대로 대선은 5년간 ‘대한민국의 대통령’이란 연기를 해줄 배우를 선발하는 오디션인지도 모른다. 3개의 연극에서 각기 다른 역할을 동시에 해내는 오만석 배우에게도 그의 고유한 삶이 있듯이 고유한 삶을 최소화하고 5년간 대한민국호의 선장 역할을 가장 잘 해낼 수 있는 사람을 선택하는 과정이고 유권자들은 심사위원들인 셈이다.

그렇다면 제일 중요한 것은 대통령의 역할을 얼마나 잘 이해하고 있는지 돌발상황에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는 무대경험이나 인생경험이 풍부한지, 상대 배우의 미묘한 변화와 관객의 미묘한 표정이나 공기의 흐름을 포착할 수 있는 통찰력을 갖추고 있는지, 자기 감성에 빠져 감정이 과하거나 모자라거나 하는 변덕을 최소화시킬 수 있는 자기객관화 능력이 얼마나 단련되어 있는지를 심사항목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디드로는 또 이렇게 말한다. “어떤 연극이 멸시받는 것은 배우들을 무대로부터 몰아내는 관중들의 야유 때문이 아니라 배우들 사이에서 나오는 야유 때문입니다. ... 그렇다면 진정한 재능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빌려 온 영혼의 외적 증상들을 잘 인지하고 우리의 말을 듣고, 우리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느낌에 호소할 줄 알고, 그런 모든 모습들의 모방, 즉 머릿속에서 모든 것을 키우면서 자신들의 판단이 규칙이 되는 모방을 통해 그 모든 것들을 속일 줄 아는 능력입니다. ... 그러므로 가장 위대한 배우란 가장 잘 알고, 가장 잘 인식되어 있는 이상적 모델에 따라 가장 완벽하게 외적인 기호들을 나타낼 수 있는 사람입니다.”
위의 책 p.93-95

김종인은 자기들이 하라는 대로 연기하지 않고 자신의 영혼을 드러낸다고 배우의 연기력 부족을 탓했으니 일견 그의 한탄은 일리 있어 보인다. 하지만 그가 간과하고 있는 것은 그건 근본적으로 배우의 탓이 아니라는 것이다. 좋은 연극을 무대에 올리겠다는 일념이 아니라 관객의 눈을 사로잡을 수 있는 인스턴트 배우를 도구화하여 자신들이 두고두고 감독 역할을 하려고 한 것에서 찾아야 한다. 마리오네트 대통령을 내세워 탄핵이라는 뜨거운 맛을 보았으면서도 포기하지 않는 권력 사유화의 꿈, 그런 면에서 배우가 문제가 아니라 배우 깜냥도 안되는 이를 주연배우로 선택한 자신들의 패착을 인정하는 것이며 관객을 우롱했음을 자백한 것이다.

인생은 순간순간 바뀌는 무대마다 재빨리 자기역할에 충실해야 티켓반환 요청을 막을 수 있다. 감독은 감독다워야 하고 배우는 배우다워야 한다. 대통령만큼 수십 수백 가지 변화무쌍한 무대를 감당해야 하는 역할이 또 있을까. 그 극한직업을 하겠다고 나서기에는 최고의 3D 업종인 것 같은데 큰 무대에서 1인 100역 이상의 작은 무대를 동시에 감수해야 하는 그 역할을 기꺼이 하겠다고 나서는 것까진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어도 디드로의 말대로 ‘감성’은 접어두고 오로지 역할에만 충실할 수 있는 주연배우는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임을 깨달았으면 좋겠다.

하지만 희극이든 비극이든 배우는 배우일 뿐, 비극은 카타르시스로 희극은 조롱으로 인간의 본성에 다가가는 것이니 알고도 모른 척 하거나 알고자 하지도 않는 청맹과니 같은 이들이 끊임없이 무대 위를 갈망하며 조롱을 감수한다는 게 희극의 비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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